고요한 산골짜기, 붉게 물든 저녁 노을이 오래된 나무 탁자에 앉은 노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다. 성 제롬이라 불리는 그는 앙상한 몸에 낡은 수도복을 걸치고, 굳게 닫힌 입술 사이로 알 수 없는 고독을 씹고 있다. 그의 곁에는 맹렬한 사자가 엎드려 있지만, 그 맹렬함은 이미 오랜 세월의 무게 앞에 무뎌진 듯 보인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혹은 자신의 죄를 묵묵히 비추는 거울처럼, 사자는 성 제롬의 곁을 말없이 지킨다. 그가 읽고 있는 성경책은 닳고 닳아 몇 번이나 손때가 묻었을까. 빽빽한 글자들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며, 그의 삶을 지탱해 온 진리의 조각들을 보여주는 듯하다. 저 깊은 산골짜기까지 들어온 것은 세상의 번잡함으로부터 벗어나 오롯이 자신과 마주하기 위함일 것이다. 험준한 산맥과 굽이치는 강은 그의 내면의 고통과 고행을 상징하는 듯하고, 그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은 경건하기 그지없다. 노인의 얼굴은 그림자 속에 가려져 있지만, 그의 굳게 다문 입술과 약간 앞으로 숙인 고개는 세상에 대한 깊은 회한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고뇌를 엿보게 한다. 오랜 죄악과의 싸움,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한 구원의 희미한 빛. 어쩌면 그는 아직도 자신의 부족함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곁을 지키는 사자는 마치 그의 고행을 이해하고 격려하는 듯,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저녁 하늘의 붉은빛은 모든 것을 포근하게 감싸 안지만, 성 제롬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는 닿지 못하는 듯하다. 여전히 그는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저 숭고한 뒷모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할까.